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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ia: Epilepsy Commu > Volume 5(1); 2023 > Article
뇌 연구의 역사 7: 뇌 기능의 국소화, 브로카 이후

Abstract

After Paul Broca localized the area responsible for producing speech in the posterior region of the left frontal lobe, John Hurling Jackson provided evidence showing the presence of different mental functions in the right and left cerebral hemispheres. His theory was confirmed by the discovery of the sensory language area by Carl Wernicke. Eduard Hitzig and Gustav Fritsch identified the motor cortex by electrical stimulation. David Ferrier also used electrical stimulation to discover other functional areas, including those responsible for hearing, vision, and intelligence. Hermann Munk correctly localized the visual cortex. The interesting story of Phineas Gage provided insights into the function of the frontal lobe. The first spontaneous electrical activity of the brain was recorded by Richard Caton, which led to the development of electroencephalography by Hans Berger.

우성 반구(dominant hemisphere)

브로카는 운동언어중추가 대부분 좌측 반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뇌엽(lobe)의 이름을 도입한 그라티올레(Pierre Gratiolet, 1815–1865)와 또 다른 프랑스 학자 르레(François Leuret, 1797–1851)와 더불어 태아 뇌 발달 과정에서 좌측 뇌가 우측 뇌에 비하여 조금 더 먼저 커지는 것을 확인하였다(르레는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롤란드[Luigi Roland, 1773–1831]의 이름을 따서 중심고랑에 Rolandic sulcus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이다). 그들은 이것이 왼쪽 뇌가 오른쪽 뇌에 비하여 먼저 발달하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는데, 좌측 뇌가 먼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언어중추가 좌측 뇌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른손잡이인 것도 설명해 준다. 반대로 왼손잡이는 오른쪽 뇌가 우성 반구가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런 이유로 브로카는 좌측 뇌(우성 반구)가 지능과 사고 측면에서 우측 뇌에 비하여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1
이러한 발견과 별도로 브로카는 언어중추가 우성 반구가 아닌 곳에 있는 여러 증례들을 발견하였다. 한 뇌전증 환자는 생전에 언어 구사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사후 부검에서 광범위한 좌측 반구의 손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브로카는 만일 뇌 손상이 충분히 어린 나이에 일어나면 반대쪽 뇌가 기능을 대신하여 언어 기능을 문제 없이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실제로 2–3세 이전에 우성 반구에 심한 손상이 있으면 반대편 뇌에 언어 기능이 생긴다).
브로카가 언어 영역을 발견했다는 업적에 대해서는 시비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 프랑스 시골 의사의 발표에서 비롯되었다. 1836년에 마크 닥스(Marc Dax, 1770–1837)라는 의사가 좌측 반구의 손상으로 실어증과 우측 편마비가 발생한 세 환자의 증례를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열린 프랑스 학회(French Academy of Science)에서 발표하였다.2 그러나 이 발표는 곧 잊혔다가 1863년에 그의 아들인 구스타프 닥스(Gustav Dax, 1815–1893)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140명의 실어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제출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논문은 특히 언어에 관한 좌측 반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는 우성 반구에 대해서 확신이 없던 시기였고 심지어는 이를 주장하는 학자를 사이비로 보는 풍조까지 있어 논문은 퇴짜를 맞았고 다시 출판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사실 브로카도 처음에는 우성 반구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다). 프랑스 학계에 화가 난 구스타프는 브로카가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가 뇌의 언어 영역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실은 편지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브로카의 발견이 최초로 인정받게 되었는데, 학계의 편파적인 분위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크 닥스는 단순히 좌측 뇌가 언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을 밝혔으나 브로카는 이 언어 영역이 전두엽의 세 번째 고랑에 위치한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성 반구의 존재를 일찌감치 주장한 닥스 부자의 연구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하다. 또 아버지를 이어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분투한 마크 닥스의 행동도 깊은 울림을 준다.
브로카가 실어증과 우성 반구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에 영국 신경학의 초석을 확립하고 현대 뇌전증 연구의 시발점으로 인정받는 헐링 잭슨(John Hurling Jackson, 1835–1911, 뇌 연구의 역사 4)도 같은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3 그는 1864년에 좌측 반구가 손상된 31명 환자의 증상을 정리하여 보고하였는데, 언어 장애와 우측 편마비를 주 증상으로 보고하였다. 하지만 2년 뒤에 그는 이 소견을 어느 정도 수정하였는데, 언어중추가 브로카가 주장한 것처럼 전적으로 좌측 반구(우성 반구)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좌측 반구가 심하게 손상된 환자들도 갑작스러운 감정 반응에 따른 말이나 욕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또 실어증이 있는 몇 명의 아이들이 말은 전혀 할 수는 없었지만 노래는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를 토대로 잭슨은 좌측 반구는 지적인 언어 능력을 갖고 있으며, 우측 반구는 감정과 관련된 발화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였다. 즉 양 반구가 모두 언어에 관계하며 다만 그 질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잭슨은 좌측 반구를 주 반구(major hemisphere), 우측 반구는 부 반구(minor hemisphere)로 명명하였다. 이 명명은 우측 반구가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었으며, 서로 보완적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좌측 반구가 손상된 환자들은 물건 또는 사람의 이름은 말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 누구인지 아는 데는 문제가 없다. 반대로 우측 반구가 손상된 환자 중에서 일부는 시각 손상 없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건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 물건의 사용 목적도 모르게 되기도 한다. 또 보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주변 환경과 길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도 있었다. 이것을 보고 우측 반구는 언어 능력이 거의 없는 데 반해 물건과 공간 인식에 중요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잭슨은 양측 반구의 기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언어와 같은 기능이 뇌의 한 부분에만 국한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였다. 뇌의 어떤 부위에 손상이 가해졌을 때 언어 장애가 발생한다고 해서 바로 그 부분에만 그 기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플루랑스(Jean Pierre Flourens)의 뇌 기능 전체주의와는 달리 특정 뇌 부위가 어떤 기능에 다른 부위보다 더 중요할 수 있음은 인정하였다. 이 생각으로 브로카의 운동 실어증을 해석한다면, 브로카 영역 이외에도 뇌 다른 부위들도 언어 표현에 관여하는 것이 맞지만 그중에서 브로카 영역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외에 잭슨의 가장 유명한 발견은 뇌전증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뇌전증에 대하여 발작 초점을 기준으로 새 분류체계를 만들었다. 이때 그가 사용한 대발작(grand mal seizure)은 최근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 특정 순서대로 운동 발작이 진행(예를 들어 처음에 한쪽 얼굴이 떨리고, 다음에 손과 팔, 그리고 다리까지 떨리는 발작)되는 현상(잭슨 발작, Jacksonian epilepsy)도 기록하였다. 그는 이 발작이 뇌 운동신경의 분포에 따라 진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뇌에 운동신경이 특정 모양과 순서로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Fig. 1).

감각 언어중추(Sensory language area)

브로카는 따로 뇌의 감각 언어중추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실어증의 다양한 형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감각 언어 영역은 1874년에 베르니케(Carl Wernicke, 1848–1904)에 의해서 발견되었다(Fig. 2).4 베르니케는 의과대학 졸업 후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면서 신경 해부로 유명한 마이너트(Theodore Hermann Meynert, 1833–1892, 여러 신경계 구조물에 이 사람의 이름이 붙어있다)와 6개월간 일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마이너트는 베르니케가 도착하기 전에 한 여성 환자를 진찰하였는데, 이 환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환자의 부검에서 좌측 측두엽의 상부에 뇌 손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이 자리는 소리를 듣는 청신경의 신호가 전달되는 자리 근처였다. 즉 소리를 듣는 자리 근처에 이 증상을 만드는 부위, 즉 언어를 이해하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Fig. 3). 베르니케는 마이너트와 일하는 중인 1874년에 ‘실어증 증상 증후군(Aphasische Symptmenocomplex)’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이 증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베르니케는 1874년에 독일로 돌아와서 같은 양상의 실어증을 보이는 여러 증례를 추가로 보고하게 되었다. 이 환자들은 브로카 실어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유창하게 말을 하는 점이 다른데, 다만 이 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마치 종교적 황홀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방언과 유사하다. 그와 더불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들리기는 하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보인다. 베르니케는 이러한 실어증을 새로운 형태의 실어증 증후군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고 이러한 업적은 당시 26세에 불과한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업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베르니케는 이러한 실어증 현상을 통해서 언어를 이해하고 말을 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는데, 우선 청각중추를 통해서 말이 접수가 되면 이는 언어 이해 영역(언어에 대한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곳, 베르니케 영역)으로 전달되어 그 뜻이 이해가 된다. 이때 사람이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따라서 말하는 경우 이 신호는 다시 전두엽의 언어 발화 영역(브로카 영역)으로 전달되어 같은 단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니케는 언어 이해 영역의 손상에 의해서 나타나는 실어증을 ‘감각실어증’으로, 브로카 영역의 손상으로 나오는 실어증은 ‘운동실어증’으로 각각 명명하였다. 이 중 감각실어증은 그의 이름을 따서 베르니케 실어증이라고 부른다.
베르니케는 이러한 언어 구조를 설명하면서 이 이론이 맞는다면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을 바로 연결하는 통로가 있어야 하며 만일 이러한 통로에 손상이 간다면 말을 듣고 바로 따라 말하는 능력에 이상이 생길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실제로 훗날에 이러한 실어증 형태가 발견되어, 알아들을 수도 있고 자기 생각을 말할 수도 있으나 따라 말하기가 되지 않는 환자들이 발견되었다(Fig. 3).5 현재에 와서는 이러한 형태의 실어증을 ‘전도실어증(conduction aphasia)’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결과는 신경해부학과 임상적 관찰이 잘 조화를 이루는 경우에 신경계 기능의 작동방법을 추론하고 모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베르니케는 글씨를 읽는 뇌 영역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 자리는 베르니케 영역 근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예측은 1892년에 프랑스 학자인 데제린(Joseph Jules Dejerine, 1849–1917)이, 뇌졸중을 앓은 후 갑자기 말을 할 수는 있으나 시각 장애 없이 글을 읽는 것만이 불가능해진(실독증, alexia) 환자를 보고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6 이 환자는 부검에서 좌측 뇌의 각회(angular gyrus)에 뇌경색이 있음이 밝혀졌는데, 각회는 시각중추와 청각중추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Fig. 4). 베르니케의 이름은 베르니케 뇌병증(Wernicke encephalopathy)에도 남아 있는데, 이는 만성 알코올 중독 환자에서 티아민(thiamine)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며, 의식 장애, 안구운동 장애, 보행 장애를 특징으로 한다. 베르니케는 안타깝게도 5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이클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운동중추의 발견

베르니케가 감각 언어중추를 발견하기 4년 전인 1870년에 두 명의 독일 학자인 히지그(Eduard Hitzig)와 프리츠(Gustav Fritsch)가 뇌 운동신경이 전두엽의 뒤 부분에 위치한다고 발표하였다(Fig. 5).7,8 그들은 마취 없이 개의 대뇌피질을 전기자극 하였고 개의 특정 부위에 불수의적인 움직임을 유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발견은 당시의 통념에 반하는 것이었는데, 대뇌피질은 전기자극에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된 이유는 할러(Albrecht von Haller, 1708–1777)와 플루랑스의 전기자극 실험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뇌피질을 뜻하는 cortex는 라틴어로 껍질이라는 뜻으로, 당시에 대뇌피질은 특별한 기능을 하지 않는 단순한 외피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루랑스는 여기에 특별히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뇌피질은 인간의 의지와 감각신경이 넓게 퍼져 있으며(전체적으로 균일하게 퍼져 있어서 한 부분을 자극해도 반응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운동은 기저핵과 소뇌가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믿음이 대세이기는 했지만 간간히 이에 반하는 현상이 보고된 바는 있다. 예를 들어 알디니(뇌연구의 역사 4)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의 대뇌를 전기로 자극하여 여러 움직임을 만드는 것을 시연한 바 있고, 롤란드(Luigi Roland)는 와이어를 돼지 피질에 삽입할 때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였다(그래서 운동신경 피질을 Rolandic cortex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미 이야기한 대로 잭슨은 잭슨 발작이라는 현상을 기록하면서 운동신경이 대뇌에 특정 순서로 배열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사실 이전에 동물에서 대뇌피질을 자극해도 운동이 유발되지 않았던 것은 동물에서 운동피질이 일반적으로 자극하는 뇌 바깥쪽이 아니라 가운데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일반적으로 전기자극을 하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히지그는 베를린 대학을 나온 자존심과 카리스마를 갖춘 의사로, 전기자극이 의료에 널리 도입되기 이전부터 전기자극을 이용한 치료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치료 세션 도중에 환자의 후두부에 강한 전기자극을 주면(머리 바깥에서 자극한 것으로 뇌피질을 직접 자극한 것은 아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였고, 이를 토대로 대뇌피질을 자극하면 특정 뇌 기능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프리츠는 반면에 의대를 졸업하기는 하였으나 자유분방한 인물로 남아프리카로 모험 여행을 가거나 이집트와 중동 지역을 돌면서 인류학책을 몇 권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행 도중에 맞이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 외과의로 참전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즉 두개골이 열린 환자의 상처를 소독하는 과정에서 약한 전기자극에 의하여 환자가 불수의적인 근육 수축을 일으키는 것을 본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대뇌피질의 자극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프리츠가 1860년대 후반에 베를린으로 이사 오면서 히지그를 만나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뇌피질 자극 실험이 여러 동물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1870년에 개를 이용한 뇌피질 전기자극 실험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들은 혀를 갖다 대면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의 약한 전류를 사용하여 대뇌피질을 자극하였고 자극 반구의 반대쪽에서 근육의 움직임을 확인하였다. 또 약한 전류를 주면 경련을 일으키는 부위가 좁아지고 더 강한 전류를 주면 그 부위가 늘어나는 것도 관찰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피질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하여 전기자극을 통해서 근육의 움직임을 일으킨 대뇌피질 부위를 외과적으로 절제하여 그 부위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도 추가로 확인하였다. 이로써 대뇌피질에 운동 영역이 있음이 추가로 확인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연구 결과를 1870년에 발표하였고, 뇌 국소화 이론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잭슨 발작 현상의 타당성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은 잭슨의 이론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논문에 인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금부터 등장하는 페리에(David Ferrier, 1843–1928)의 분노를 불러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운동피질에 의도적으로 손상을 주어도 그에 해당하는 운동기능의 완전한 마비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운동기능 영역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 외에도 많은 다른 뇌 영역들이 운동 기능에 기여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 국소화라는 것이 ‘뇌의 바로 이 한 부분만이 전적으로 그 기능을 담당한다’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뇌 전기자극의 발전

전기자극으로 대뇌피질을 자극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스코틀랜드 사람인 페리에(David Ferrier, 1843–1928)가 이 기술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여 신경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Fig. 6).9,10 에든버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전공하기도 했던 페리에는 1870년에 런던의 왕립병원(King’s College Hospital)에서 신경병리학자로 근무하면서 동시에 ‘마비 및 뇌전증 환자를 위한 국립병원(National Hospital for Paralysis and Epilepsy)’에서도 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잭슨과 개인적으로 교류하게 되면서 페리에는 뇌 연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잭슨은 이후로 페리에의 멘토이자 진정한 친구로 남게 된다. 마침 1873년에 영국의 가장 큰 정신병원(West Riding Lunatic Asylum in Wakefield)으로부터 초청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수천 명의 정신질환 환자가 있을 뿐 아니라 첨단의 연구 시설과 동물실험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후 3년에 걸쳐 페리에는 잭슨과 히지그, 프리츠의 발견을 여러모로 발전시키게 된다.
페리에의 실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전기자극에 의한 뇌 운동중추의 국소화이며 다른 하나는 전기자극으로 확인된 운동피질에 손상을 주어 해당되는 운동 기능이 없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페리에는 직류 전기를 이용하는 대신에 패러디 자극(faradic stimulation)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직 손상을 피하면서 조금 더 일정한 자극을 대뇌피질에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통해서 페리에는 잭슨이 예상했던 대로 전기자극에 의해서 운동발작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어서 페리에는 히지그와 프리츠의 실험 결과를 발전시켜 운동피질의 국소 지도를 완성하고자 했다. 그는 동물을 마취시키는 경우 전기자극을 더 길게 줄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전기자극의 강도를 낮게 주는 경우 아주 세분된 운동을 만들 수 있으며, 강도를 높이면 보다 복합적이고 조화로운 운동까지 유발할 수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 여러 종류의 동물에서 이러한 실험을 적용하여 동물별로 운동신경의 분포와 운동피질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도 관찰하였다. 즉 동물별로 발달한 운동 기능에 따라 운동신경이 다르게 발전한 것이다.
페리에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영국 왕립학회에서 발표하고 그 학회의 가장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우여곡절도 있었다. 보통 이러한 논문을 발표하는 경우 이전의 중요한 연구 결과를 자세하게 인용하는 것은 당연한데, 페리에는 히지그와 프리츠의 실험 결과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 이들이 페리에의 멘토인 잭슨의 연구 결과를 무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술지 측은 이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여 다시 논문을 작성하도록 하였으나 페리에는 그마저 거부하였다. 그리고 원숭이의 운동중추를 찾는 데 주력하였다. 사실 히지그와 프리츠의 실험은 전적으로 개를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숭이 실험이 주된 주제로 떠오르게 되면 이들의 연구 결과를 덜 인용해도 되기 때문이다.
페리에는 실제로 원숭이 실험을 계속하여 모두 19군데 뇌 영역에서 전기자극을 통해서 각기 다른 운동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 영역들이 모두 전두엽의 뒷부분에 모여 있는 것도 확인하였다. 이 밖에 두정엽이나 측두엽처럼 운동 중추에서 떨어진 곳을 자극하면 더 복합적인 운동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보았다. 페리에의 이러한 실험 결과는 임상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원숭이는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 더 근접한 영장류이고 만일 이 실험이 사람의 운동중추 발견으로 연결된다면 향후 뇌 수술 등에서 중요한 운동신경의 보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페리에는 원숭이에서 확인된 운동신경 지도를 인간에게 적용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 지도는 이후의 임상 의사들에 의해서 대뇌 병소의 위치와 신체 마비 부분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확인되었다.

인간 뇌에서의 전기자극

페리에가 원숭이를 이용한 전기자극을 시행하고 있을 시점에 미국 학술지에 인간 대뇌를 전기자극한 최초의 실험이 보고된다. 이전까지 남성 성기능 장애에 대한 전문가로, 또 주사기를 통한 약물 투입에 관한 매뉴얼로 이름을 알린 미국의 바톨로우(Robert Bartholow, 1831–1904)는 어느 날 치명적인 두피 악성궤양을 앓던 메리 래퍼티(Mary Rafferty)라는 30세의 환자를 보게 된다.11 바톨로우에 인계될 당시 래퍼티는 이미 두피 궤양과 두개골 감염으로 대뇌 후반부의 두피와 두개골을 절제한 상태로, 경막에 둘러싸인 대뇌가 겉으로 드러나 있었다. 바톨로우는 약한 교류 전류를 경막으로 흘리는 방법으로 대뇌피질을 자극하였다. 대뇌 후반부만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운동피질 부위인 전두엽을 직접 자극할 수는 없었지만 상부 두정엽은 자극할 수 있었고, 좌측 대뇌를 자극한 결과 우측 손, 팔, 다리가 경직되면서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대로 우측 대뇌를 자극하면 좌측 신체에서 같은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험을 4일에 걸쳐 총 6회의 세션으로 진행하였다. 비록 환자의 동의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바톨로우는 논문에서 경막 자극으로 인한 통증의 유발(경막에는 통증 신경이 분포하므로 경막을 자극하면 심한 통증이 유발된다)이나 전기자극을 위한 전류의 강도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바톨로우가 갑자기 이러한 실험을 하게 된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살아있는 동물을 이용한 의학 실험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었고 실제로 본인도 동물실험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톨로우도 그동안 발표된 페리에의 논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바톨로우는 경막 자극 후에도 실험을 계속하여 노출된 대뇌피질을 직접 자극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두정엽을 자극하면 운동 반응 후에 기분 나쁜 감각이 반대쪽 몸에 느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바톨로우가 점차 자극 강도를 높여가면서 마침내 환자는 전신발작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전기자극 없이 우측 마비가 심해지면서 결국 심한 발작 후에 환자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다음 날 사망하였다. 부검 결과 전기자극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감염이 퍼져서 고름이 형성된 것이 관찰되었다. 바톨로우가 이러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자 주로 비난의 목소리가 컸고, 페리에도 처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이러한 실험은 다시는 실행되지 말아야 한다고 비난하였다. 심지어 바톨로우 본인도 만일 이러한 실험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범죄 행위라고 고백하였다. 래퍼티의 사례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지만 바톨로우는 새로운 치료의 발견을 위한 의학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며, 이후 필라델피아 제퍼슨 의과대학의 학장을 지내면서 순조로운 일생을 보냈다.

청각 및 시각중추

페리에의 업적 중에는 청각중추의 발견도 있다.12 페리에가 동물실험에서 가쪽고랑(sylvian fissure) 주변의 측두엽 상부를 자극하자 동물이 마치 무슨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페리에는 이 자리가 청각중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원숭이에서 양측 측두엽 상부에 손상을 주면 원숭이가 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가 같은 방법을 개에게 시행한 결과 청각 소실이 단기적으로만 나타나고 이후 회복된다는 결과를 발표하자, 이 현상의 지속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측두엽 손상을 준 원숭이를 1년 이상 생존시키면서 청각 소실 지속 여부를 관찰하였다. 그 결과 이렇게 만들어진 청각 소실이 지속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회에 직접 원숭이를 동반하여 귀 바로 옆에서 총을 발사하는 시연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총이 바로 귀 옆에서 발사되는데도 원숭이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각중추의 위치에 관한 페리에의 주장은 더욱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13 1875년에 페리에는 두정엽의 각회를 전기자극 하였는데(Fig. 4), 이때 원숭이는 마치 시각 감각을 느낀 것처럼 눈을 움직이고 깜박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을 증거로 오랜 세월 동안 정체를 몰랐던 시각중추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안구에서 출발한 시신경이 뇌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뇌에 시각중추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나 실제로 정확한 시각중추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1724년에 이탈리아의 인체 해부학자인 산토리니(Giovanni Santorini, 1681–1737)가 뇌로 들어간 시신경이 시상의 한 부분(외측 슬상핵, lateral geniculate body) (Fig. 7)에 이르는 것을 보고 이 자리를 시각중추로 추정한 바가 있었다(실제로 시각을 담당하는 신경은 이 부분을 거쳐 후두엽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플루랑스는 대뇌피질을 모두 제거하면 시각 기능이 사라지는 것을 본 바 있었다. 플루랑스는 잘 알려진 전체주의자(뇌는 전체가 합쳐져서 기능을 하지 뇌 특정 부분이 특정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이므로 특정 뇌 부분을 시각중추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1855년에 이탈리아 해부학자인 파니자(Bartholomo Panizza, 1785–1867)가 후두엽에 뇌졸중을 앓은 사람에게서 시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였고, 개 실험에서 한쪽 눈이 멀게 되면 시신경이 퇴행하면서 후두엽까지 그 손상이 진행되는 것도 확인하였다.14 그러나 이러한 선구적인 연구 결과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래도 페리에는 각회를 시각중추로 지정하는 시점에서 파니자의 보고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페리에가 후두엽을 자극했을 때는 아무런 눈동자의 움직임도 관찰할 수 없었고 후두엽에 병소를 만들어도 특별한 시각 손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쪽 각회에 병소를 만드는 경우 반대쪽 눈의 시각이 손상이 되며 양쪽에 손상을 주면 원숭이가 바로 앞에 있는 물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페리에는 최종적으로 각회를 시각중추라고 지목하게 된 것이다.
페리에의 이러한 주장은 2년 뒤에 독일 생리학자인 뭉크(Hermann Munk, 1839–1912)에 의해서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15 뭉크는 동물실험에서 각회가 아니라 양측의 후두엽 피질을 제거하면 완전한 실명 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 더 중요한 발견은 한 쪽의 후두엽 피질에 손상을 주면 반대쪽 눈이 아니라 양쪽 눈의 반대쪽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Fig. 7). 이 외에 뭉크는 매우 흥미로운 발견도 하였는데, 후두엽 근처에 작은 병소를 만들면 동물이 물체를 볼 수는 있으나 그 물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동물이 배고픈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보아도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불을 갖다 대어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도 이 동물들은 장애물을 잘 피할 수 있었다. 마치 동물이 볼 수는 있으나 시각으로 확인된 물체에 대한 기억이 없어진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뭉크는 이 현상을 정신적 실명(psychic blindness)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는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고 충분한 시간을 주면 동물들은 다시 물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후두엽이 일부분만 살아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실명 상태를 벗어나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후두엽이 모두 손상될 정도로 큰 병소를 만들면 영구적 실명이 오게 되는데, 이를 피질 실명(cortical blindness)이라고 표현하였다.
페리에와 뭉크는 이 문제로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고 결국 뭉크의 이론이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페리에가 이러한 잘못된 결론을 내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페리에의 실험동물들은 병소를 만든 후 대부분 몇 주 만에 죽었기 때문에 시각 이상이 지속되는지 혹은 좋아지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반면에 뭉크의 동물들은 몇 개월 또는 몇 년까지도 생존했으므로 시각 증상이 점차 좋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페리에의 각회 손상 후에 생기는 시야 장애는 영구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페리에가 후두엽이라고 생각하고 손상을 준 자리가 사실은 후두엽 전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페리에는 병소를 만들 때 새발톱고랑(calcarine fissure)이라는 자리를 남겨놓았는데, 바로 이 자리가 결정적으로 시각에 중요한 중추였다. 즉 페리에가 후두엽에 손상을 주어도 시각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시각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뭉크는 이러한 사실을 1881년에 베를린 생리학회에서 발표하면서 페리에의 업적을 심하게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과도한 비난은 본인의 명성에도 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대뇌피질의 국소화에 관한 증거가 쌓여갔지만 여전히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많이 있었다. 그중에 스트라스부르크의 골츠(Friedrich Leopold Goltz, 1834–1902)가 있었다.16 그는 개구리의 대뇌를 제거해도 개구리가 계속 울 수 있고, 개의 대뇌피질을 제거해도 감각을 느낄 수 있어 밝은 빛을 피할 뿐 아니라 모양은 이상했지만 걷는 것도 가능한 것을 관찰하였다. 또 음식을 찾는 능력은 없어졌지만 음식을 입에 가져다주면 먹는 데 문제가 없었다. 골츠는 이러한 결과를 대뇌 국소화에 반하는 증거로 보았으며 대뇌 어느 부분이라도 일정 부분 이상이 손상되면 주의력 등에 장애가 생겨 행동 변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골츠는 이렇게 만든 개들을 1881년 영국에서 열린 국제 의학회에 직접 데려가서 발표하였다. 이 학회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학회였으며 학자의 연구 결과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무려 120,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모였으며, 발표자만 해도 70개국, 3,000명 이상이었다. 골츠는 이 자리에서 대뇌피질의 대부분이 제거된 개들이 뛰어다니고 보거나 냄새를 맡고 통증을 느끼는 것을 시연하였다. 그러나 이 발표 뒤에 바로 페리에가 등장하여 자신의 유명한 원숭이들을 선보였다. 이 원숭이들은 대뇌피질의 작은 병소로 인하여 선택적인 운동, 시각 장애 등이 생긴 상태였다. 곧이어 두 사람은 격렬한 토론을 벌였고 특히 페리에는 골츠가 대뇌피질의 중요한 부분들을 모두 제거하지 않았다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토론 끝에 좌장은 두 사람에게 실험동물 한 마리씩을 희생해서 대뇌를 조사할 것을 제안하였고 두 사람의 동의 하에 이 확인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페리에의 말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즉 페리에가 주장하는 병소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나 골츠의 개에는 상당한 부분의 대뇌피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골츠는 이외에도 귀의 세반고리관이 몸의 위치 감각을 전달하며 자세를 유지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페리에의 이러한 공개적인 행보는 동물 보호 단체의 눈에 띄는 계기가 되었고 1876년에 통과된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소환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동물보호법은 동물실험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거나 연장하는 목적을 갖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시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실험은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페리에는 물론 이러한 허가를 신청하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부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도 무죄로 방면되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동물의 권익 보호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두엽의 기능

페리에의 다음 목표는 전두엽의 기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미 브로카가 언어중추를 발견하였고, 프리츠와 히지그에 의해서 운동중추가 전두엽에 있음이 확인된 바 있으나 이 두 영역은 전두엽의 전체 크기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분이었다. 전두엽은 인간에서 가장 발달한 부분으로 전체 대뇌의 30%를 차지하며, 진화 과정에서 가장 최근에 발달한 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가 이 부분에 인간의 추상적 사고, 인간성, 도덕적인 생각 등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1870년대에 페리에는 동물을 이용하여 전두엽의 기능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전두엽의 앞부분을 전기자극 하였을 때 특별한 반응을 관찰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제거하게 되면 원숭이의 행동 양상이 뚜렷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동물이 더 이상 주변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지는 것이었다. 마치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지능이 없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근거로 페리에는 전두엽에 지능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페리에와 설전을 벌였던 골츠도 이 의견에 동조하였다. 골츠도 개에서 같은 실험을 하였고 개들의 표정이 다르게 변하며 정상적인 공포 반응도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이러한 의견이 지배적인 것은 아니었고, 독일 학자로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과학자의 훌륭한 모델로 알려진 로엡(Jacques Loeb, 1859–1924)이 ‘개에서 제거하여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부분은 바로 전두엽이다’라고 하였던 것과 같은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1878년에 ‘미국 쇠 지렛대 증례(American crowbar case)’로 알려진 매우 흥미로운 증례가 발표되었다(Fig. 8).17 증례의 주인공은 게이지(Phineas Gage, 1823–1860)로,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848년에 끔찍한 화약 폭발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폭파 직전에 뒤쪽에 있던 동료에게 잠깐 한눈을 팔면서 폭발 선상에 얼굴을 들이미는 결과가 되었다. 이 폭발로 길이 110 cm에 무게가 6 kg에 가까운 쇠기둥이 날아가서 게이지의 왼쪽 빰을 뚫고 왼쪽 눈 뒤를 지나 왼쪽 뇌를 관통하면서 두개골 위로 뚫고 지나가게 되었다. 즉 게이지는 대뇌 전두엽에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처음에 잠깐 동안 경련을 하면서 정신을 잃었던 게이지는 수 분 후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마치 멀쩡한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병원에 실려간 게이지는 스스로 걸을 수도 있었고 곧 작업장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자신하였지만 바로 다시 혼수상태로 빠졌다. 여기에다 감염도 문제가 되어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2개월 만에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하였다. 사고의 흔적은 겉으로는 왼쪽 눈의 실명과 두개골의 함몰 흔적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체적으로는 일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인간성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사고 전까지 책임감 있고 매우 효율적인 일꾼이었던 게이지는 사고 후에는 매우 변덕스럽고, 충동적이며 자제가 안 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상스러운 말을 쓰고 동료에 대한 예의도 없으며, 사회 규약을 지키려는 노력도 없었다. 이 증례를 발표한 담당 의사 할로우(John Harlow, 1819–1907)는 게이지를 어린이의 지능에 성인의 힘과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결국 게이지는 본인의 직장으로 복귀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한때 뉴욕의 한 박물관에서 자신의 철봉과 같이 전시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할로우는 1868년에 사고 이후의 게이지의 인생 역정을 다시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한 증례의 장기간의 변화를 관찰한 모범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페리에는 게이지의 케이스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 증례로 전두엽의 손상으로 운동이나 감각에 이상 없이 인격의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게이지는 신경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증례의 한 예로 기록되고 있으며 게이지의 두개골은 아직도 하버드 대학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셰링톤은 1892년에 이러한 페리에의 전체 업적을 칭송하면서 ‘과학적인 골상학(이전의 비과학적 골상학과 달리 과학적 실험에 바탕을 둔 뇌 기능의 국소화를 밝혔다는 점에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하였다.

대뇌의 기능과 전기생리학적 측정

신경외과학적 두뇌 기능의 발견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대뇌의 전기생리학적 측정이 시작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대뇌 전기생리학적 변화를 최초로 측정한 사람은 캐튼(Richard Caton, 1842–1926)이다.15 페리에와 같이 에든버러에서 수학한 캐튼은 리버풀 의학 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왕립병원 학교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토끼와 원숭이를 주로 사용하여 대뇌피질의 자발적, 또는 기능과 관련된 전기생리학적 변화를 갈바노미터(galvanometer)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결과들을 1875년에 영국 학회에서 발표하고 곧이어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캐튼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평상시에는 대뇌피질의 바깥쪽이 안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양극을 유지하다가 대뇌피질이 기능을 수행하는 순간에는 상대적으로 음극 쪽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캐튼이 사용한 운동 방법은 고개를 돌리거나 음식을 씹는 행동 등이었고, 감각 자극으로는 빛을 이용하였다. 특히 페리에가 발견한 눈꺼풀 움직임과 관련된 뇌 부위는 빛을 망막에 주는 경우 뚜렷한 전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캐튼은 전극을 두 개 이상 부착하여 전기의 방향이 바뀌는 것도 관찰하였고, 수면 중에 전기의 강도가 강해지고 실험동물이 죽은 후에 점차 약해지다가 없어지는 것도 밝혔다. 케튼은 이 연구 결과를 1877년에 미국에 건너가서도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다른 연구자들은 이 결과를 잘 알지 못하였고, 그 결과 다른 여러 학자가 서로 자신이 최초로 대뇌피질의 전기생리학적 변화를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혼란이 생겼다. 결국 1891년에 캐튼이 독일의 의학잡지의 편집장에게 1875년의 본인의 연구를 다시 요약하여 보내면서 자신의 업적을 재강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캐튼의 업적은 마침내 버거(Hans Berger, 1873–1941)가 1929년에 사람의 뇌파를 기록하는 데까지 연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버거는 다른 연구자들과는 달리 캐튼의 업적을 확실하게 인용하였는데 불행히도 이미 4년 전에 캐튼은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버거는 독일의 정신과 의사로서 1924년에 뇌파(electroencephalography)를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Fig. 9).18 버거는 처음에 천체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수학을 공부하기로 했는데, 한 학기 만에 중단하고 1년 계약으로 기병으로 지원하였다. 그런데 기병 훈련 중에 버거의 인생을 바꿔 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말이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뒤에서 말이 끄는 대포가 제때 멈춰 서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크게 놀라기는 했지만 부상 없이 일어난 버거는, 그 뒤에 놀라운 연락을 받게 된다. 바로 같은 시간에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그의 집에 있던 여동생이 강한 예감을 갖고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부대에 연락해서 오빠가 무사한지 물어보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버거는 위험에 처한 자신의 생각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유달리 가까웠던 동생에게 전달된 것으로 생각하고 군 생활이 끝나자마자 경로를 의사가 되는 길로 바꾸어서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이 어떻게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깥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를 일생의 화두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4년에 최초로 뇌의 전기적인 현상을 두피에서 기록하면서 인간의 뇌파를 최초로 측정한 사람이 된 것이다(물론 처음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막상 기록에 성공하고서도(당시 일반적인 개념에 너무 반하는 결과여서) 5년이나 고민 끝에 출판을 하였다. 역시 당시 독일 과학계의 반응은 그의 발견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이었다. 버거는 이러한 반응에도 전혀 굴하거나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만, 사실 그가 기계나 전기에 문외한이었던 것이 문제를 더 키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영국 생리학자인 아드리안(Edgar Douglas Adrian, 1889–1977)과 매튜스(Bryan Harold Cabot Matthews, 1906–1986)가 1934년에 뇌파의 전기생리학적 특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1930년대 후반부터는 뇌파의 존재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아드리안은 단일 신경섬유(nerve fiber)의 전기적 흐름을 연구하던 1928년에 신경세포에 전기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전극을 개구리의 시신경에 연결하고 망막의 자극과의 관계를 보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캄캄한 공간에서 연구 도중에 반복해서 증폭기로 활발한 전기 현상이 들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 전기 신호를 의미하는 소리는 아드리안 자신이 개구리의 눈앞에서 움직일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었고 결국 개구리가 아드리안을 볼 때마다 시각세포에서 전기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19 이 발견으로 아드리안은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아드리안은 이 결과를 더 확장해서, 각 동물의 피부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대뇌의 감각신경의 지도도 작성하였다.

NOTES

Conflicts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unding

None.

Author contributions

All work was done by Lee SK.

Fig. 1.
Topographic presentation of the motor cortex. The motor cortex is located in the posterior frontal area just anterior to the central sul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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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Carl Wernicke (1848–1904). United States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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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Wernicke area (the sensory language area) is located in the superior temporal lobe adjacent to the auditory cortex. Wernicke area and Broca’s area are connected by a bundle of nerve fibers called the arcuate fasciculus. To repeat words, at first the sound reaches Wernicke’s area through the auditory cortex and traverses to Broca area through the arcuate fasciculus. Disrupting the arcuate fasciculus causes conduction aphasia, in which a patient can speak voluntarily and comprehend language but cannot repeat words that he or she h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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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The location of the angular gy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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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Portrait of Eduard Hitzig and Gustave Fritsch.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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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David Ferrier (1843–1928).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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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Visual pathway. When an injury (thick red bar) occurs in the optic radiation or occipital lobe in one hemisphere, a patient cannot see the contralateral side in both eyes (homonymous hemianop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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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A) Schematic illustration of the case of Phineas Gage. (B) Skull and death mask of Phineas Gage; Warren Anatomical Museum of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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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Hans Berger (1873–1941).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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